본문 바로가기

김상희·정훈희·혜은이·장미화·이은하

♬안개/정훈희♬

    ♬안개/정훈희♬ (박현 작사/이봉조 작곡) (1972.정훈희 히트송 총결산집/오아시스 레코드 OL-1124) 1. 나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거리 그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에 그림자하나 생각하면 무엇하나 지나간 추억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 아~ 아~ 그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안개속에 외로히 하염없이 나는 간다 돌아서면 가로막는 낮은 목소리 바람이여 안개를 걷어가다오 아~ 아~ 그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안개속에 눈을 떠라 눈물을 감추어라 SIDE - 1 1.안개 2.꽃길 3.슬픈 안녕 4.사랑이 미움되면 5.어쩌다가 6.그사람 바보야 SIDE - 2 1.스잔나 2.러브 스토리 3.마음은 짚시 4.나오미의 꿈 5.꽃봉투 6.너무나 사랑했기에 가수 정훈희가 노래하는 모습을 담은 1970년 영상입니다. 작곡가 이봉조가 함께 출연했습니다. ◇정훈희◇ 이름 : 정훈희 출생 : 1952년 5월11일 가족 : 남편 : 김태화 아들 : 김유진, 김진성 조카 : 제이 데뷔 : 1967년 '안개' 경력 : 대한민국가수협회 이사 수상 : 1975년 칠레 국제가요제 3위 1972년 제5회 그리스가요제 인기상 1972년 '송 오브 올림피아드'로 명명된 제5회 그리스 국제가요제가 아테네에서 열렸다. 정훈희는 이봉조 작곡의 '너'를 불러 장려상과 더불어 참가 아시아 가수들 중 유일하게 베스트 7에 진입, 4위에 입상을 했다. 그 해 10월엔 이봉조 작곡 '좋아서 만났지요'로 동경국제가요제 본선에다시 진출, 특별 가수상을 연이어 수상했다. 이때 작곡가 이봉조는 베스트11 작곡가상을 동반 수상하며 환상의 콤비라는 명성을 드높였다. 당시 한복을 입고 출전한 정훈희의 의상은 한국 고유의 이미지를 잘 살렸다'는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이 같은 성과 뒤에는 선배가수들의 숨겨진 노고가 있었다. 당초드레스를 입고 출전을 하려했던 그녀는 한복 출전을 고집하는 이봉조의 제안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러나 준비해 간 한복이 없어 서울에 있던 선배 가수 현미에게 도움을청했다. 이 같은 사정을 알고 정훈희와 몸매가 비슷한 한명숙씨의 한복을빌려 급하게 공수해 주었던 현미는 숨은 공로자였다. 2회 연속 동경가요제에 수상한 정훈희는 73년 일본 최대음악재단인 야마하 재단의 킹 레코드와 1년 간 녹음 계약을 채결하고 일본 무대에 진출했다. 예명을 하니 준으로 정한 그녀는 무명 일본인 작곡가의 '이름하여 사랑'이란 곡과 이봉조의 '좋아서 만났지요'를 '고독은 무거워'로 변경, 3월21일 싱글 도너츠 디스크를 발표했다. 일본 현지에서는 "국제 가요제 수상 경력의 톱 가수가 아마추어 작곡가의작품 발표에 응한 것이 놀랍다"는 반응이 나왔다. 당시 일본에 건너 가 활동을 했던 우리 가수들의 성적은 부진했다. 비슷한 시기에 '준과 숙'이란예명으로 일본 활동을 시도했던 펄씨스터즈도 좌절의 기억 뿐 별반 성과를거두지 못했다. 비교적 좋은 조건으로 일본 진출을 시도했던 정훈희도 사정은 비슷했다. 현지 사정을 모른 채 큰 꿈만을 안고 무리하게 일본 진출을 시도했던 정훈희는 서신으로 야마하 전속 가수로 홍콩가요제참가 의사를 밝히는 등 흔들리는 정체성을 보였다. 74년 초 귀국 때는 말끝마다 일본식 발음을 연발하며 '일본으로 건너가서열심히 활동하겠다'는 것을 "일본에 귀국해서.."라는 표현을 써 '머지않아일본에 귀화할 예정'이라는 구설수에 휘말리기도 했다. 74년 5월 조선공사대표이사 남궁련씨의 사돈인 한영복씨와 결혼설이 나돌았지만 역시 해프닝이었다. 일본 진출 실패 후 정훈희는 쓸쓸히 귀국해 한동안 잠적 했다. 공백을 깨고 이봉조에게 12곡을 받아 다시 활동에 들어가기에는 3개월의 기간이 필요했다. 이봉조와 재결합한 그녀는 75년 '무인도'를 가지고 남미의 칠레 국제가요제에 도전했다. 여기서 그녀는 인기 가수상과 더불어 3위에 입상함으로써 부활을 선언했다 작곡가 이씨는 편곡상을 동반 수상했다. 이때 재기를 위해 혼신의 힘을 쏟은 정훈희는 현지에서 장출혈과 신경 쇠약 증세로 입원까지 했다. 당시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대통령이 보내 온 화환은 화제가 되었다. 다시 인기를 회복한 정훈희는 그 해 7월 큰 사고를 당했다. 도봉구 삼미극장 분장실에서 현철원이라는 20대 청년에게 콘크리트조각으로 얼굴을폭행을 당하는 일이 벌어진 것. 그녀를 짝사랑했던 남성 팬이 무대로 찾아가 애인임을 자칭하며 만나게 해달라고 떼를 쓰다 거절당하자 저지른 사건이었다. 이후 정훈희도 대마초 파동에 연루, 입건되면서 활동 정지를 당했다. 76년 4월 임희숙 등과 함께 해금이 되었지만 TV등 방송 매체 활동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77년 8월 TBC '쇼는 즐거워'는 재기의 무대였지만 예전과 같은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또 다시 가요제 출전으로 승부를 걸었다. 79년 제20회 칠레가요제. 정훈희 이봉조 콤비는 '꽃밭에서'를 불러 최우수 가수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일궈냈다. 당시 칠레가요제는 5만명을 수용하는 노천극장에서 대통령이 참가한 가운데 치러졌던 거국적인 행사였다. 그녀는 76년 대마초가수로 처벌을받은 이후 또 다시 국제가요제에서 국위를 선양하며 대마초가수들의 해빙기를 가져왔다. 당국에서는 "국위를 선양한 대마초 연예인에 대해서는 선처를 베풀 것"이라며 정훈희의 칠레 가요제 실황 필름을 전국에 방송하기도 했다. 80년 정훈희는 라스트찬스의 리드 싱어 출신 로커 김태화와 약혼발표를했다. 두 사람은 교제 1년 만에 심 한 성격 차와 정훈희 집안의 강력한 반대로 헤어지는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재결합한 정훈희는 83년 김태화의아들을 낳았다. 이후 김태화는 국내 활동을 선언하고 그룹 뿌리의 리드싱어로 출발했다. 그는 '바보처럼 살았군요'로 79년 말 캐나다 태평양가요제와 82년 MBC국제가요제에 '변덕스러운 그대'로 참가하는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다이나믹한 록 창법과 매끄러운 스테이지 매너로 밤무대에서 젊은 층의인기가 대단했던 그는 김태화와 타이거즈'라는 자신의 그룹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1989년 정훈희, 김태화 부부는 '우리는 하나'라는 듀엣음반을 발표해 10만 여장의 레코드 판매고를 올리며 건재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들 부부는 현재 대한과 민국 두 아들과 함께 부산 인근의 기장 해변에까페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 신세대 가수로 부상했던 J는 그녀의 조카로,음악 가족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정훈희는 기장읍 문화예술회장으로 지역 문화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이수미 등 친분이 두터운 동료 가수들과 함께 '우정의 콘서트'란이름으로 서울, 부산 등에서 변함 없는 노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출처]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정훈희 "안개"가 실린 음반 표지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에 진주해 온 전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여귀(女鬼)가 뿜어 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 중) 음악과 문학에서의 소재 가운데 '낙엽' 다음으로 매력 있는 소재가 '안개'라고 생각을 한다. 안개란 개념은 상당히 동양적인 것인 동시에 한국적인 것이다. 동양화에서 농촌, 강촌의 풍경에는 으레 비 온 뒤 피어오르는 자욱한 물안개와 산안개가 덮여 있음을 발견한다. 안개가 가령 사랑과 연결된다면 더욱 로맨틱한 상상력이 그려진다. 사랑도 보통 사랑이 아니라 비탄, 애련, 실연 등의 짜릿한 감정이 첨가되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것이다. 정훈희 번안곡 '마음은 짚시'가 수록된 가수 정훈희 스테레오 독집 음반 표지 '안개'를 부른 가수 정훈희의 목소리는 참 특이하다. '김상희'가 동물성이고 '이미자'가 식물성이라면 '정훈희'의 목소리는 다분히 광물성에 가깝다. 처음 듣게 되면 아주 따가운 느낌을 받는다. 동시에 무척 차갑다. 그러나 '정훈희'의 매력은 바로 이런 감각이라고 생각한다. 1968년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파월장병 위문공연에서 열창하고 있는 가수 정훈희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생각하면 무엇하나 지나간 추억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 아~아~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안개 속에 외로이 하엽없이 나는 간다 돌아서면 가로막는 낮은 목소리 바람이여 안개를 걷어 가다오 아~ 아~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안개 속에 눈을 떠라 눈물을 감추어라 (박현 작사·이봉조 작곡) '안개'는 1967년에 발표된 가수 정훈희의 데뷔곡이자 대표곡이다. 수많은 작곡가와 가수가 콤비를 이뤄 최상의 곡을 히트시킨 전례가 많다. 박시춘, 남인수가 그렇고 이재호, 백년설이 그렇듯이 이 곡 또한 이봉조와 정훈희가 콤비를 이뤄 만든 히트곡이다. 제1회 도쿄국제가요제(1970년)에서 '안개'를 열창하고 있는 가수 정훈희 '안개'는 원래 남성 사중창단 쟈니브라더스가 먼저 불렀던 미완성곡을 보완하여 당시 여고 1학년이던 정훈희에게 부르게 했다. MBC 라디오 박진현 PD가 노랫말을 쓰고 이봉조 선생이 곡을 붙인 작품이다. 정훈희는 이 노래로 팝스타일의 창법을 구사하는 신인 여가수로 주목받으면서 스타덤에 올랐다. 정훈희 "무인도"가 실린 음반 표지 어느 거리인지는 모르지만, 실연당한 여인이 안개가 자욱한 거리를 거닐며 추억에 잠기게 된다. 사랑했던 남자는 어딘가로 떠나가 버렸다. "생각하면 무엇하나" 하지만 연인에 대한 "애타는 마음"으로 그녀는 발걸음이 무겁다. 그리고 안개빛의 쓸쓸한 멜로디, 그러기에 더욱 혼자 걷는 외로움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 노래가 히트하자 노래를 소재로 한 영화도 나왔다.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원작으로 한 영화 '안개'(신성일/윤정희) 영화 속에서 정훈희의 노래 안개에 맞춰 윤정희가 립싱크하는 장면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원작으로 한 영화 '안개'(신성일/윤정희) 1970년 영화감독 김수용이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원작으로 한 영화 '안개'(신성일/윤정희/이빈화, 원작: 김승옥作 '무진기행)를 만들면서 이봉조가 쓴 주제가를 정훈희에게 부르도록 했다. 영화 속에서 정훈희의 노래에 맞춰 윤정희가 립싱크했다. 1970년 디바 정훈희 음반 표지 특히 가수 정훈희는 ‘안개’로 1970년 제1회 도쿄 국제가요제에서 ‘월드 베스트 10’에 뽑혔다. 데뷔 초기이긴 했으나 스웨덴 출신의 세계적 그룹 아바도 입상권에서 벗어날 만큼 치열한 경쟁 무대였고, 한국 대중가수
♣머무시는 동안 즐거우셨으면 합니다♣ ★一片丹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