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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僧房悲曲 (1955)/朴載弘♬

一片丹心 靑岩 2019. 8. 22. 11:00
♬僧房悲曲 (1955)/朴載弘♬
blog.daum.net/shs7741 一片丹心
  
    ♬僧房悲曲 (1955)/朴載弘♬ (孫露源 作詞/李在鎬 作,編曲) 1.♬ 복사꽃잎 안개나린 새파란 연기위에 아롱대는 앞산녀의 물들인 날을 오늘밤도 얼싸안고 우는 저 여승 죄도많은 속세가 한이됬구나 2.♬ 청실홍실 얼룩져진 새파란 연기위에 두손빌던 앞산녀의 우는 모습이 오늘밤도 그리워서 우는 저 여승 열아홉의 스러진 사랑있구나 3.♬ 구령소리 팔랑대는 새파란 연기위에 울려주던 앞산녀의 움튼 노래를 오늘밤도 못잊어서 우는 저여승 백팔염주 독방에 운이섧구나 앨범명 : SP [승방비곡/그리워라 나포리] 제작회사 : (1955) 미도파 M-512-AB SIDE-A 1.僧房悲曲(朴載弘) SIDE-B 1.그리워라 나포리(송민도) 승방비곡(僧房悲曲)은 최독견(崔獨鵑.최상덕)이 지은 장편소설이다. 1927년 5월 10일부터 9월 11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된 것으로, 1929년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줄거리) 주인공 최일영은 금강산에서 자라난 청년으로 일본에 건너가 불교대학에서 공부하다가 절로 들어가는 도중 마침 금강산 구경을 가는 소프라노 가수 은희와 알게 되어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이 결혼을 하려 할 때 은희의 집에서 반대를 한다. 특히 은희의 어머니가 한사코 반대하였다.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사랑은 드디어 결혼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날 어머니는 한 통의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살을 한다. 유서의 내용은 은희의 어머니가 아이를 낳기 위해 절에 가 불공을 드릴 때 그 절의 현암스님과 알게 되어 영일을 낳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영일과 은희는 남매가 되는 셈이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막장소설>이다. 1931년 동양영화주식회사가 최독견(崔獨鵑)의 <승방비곡>을 이서구가 각색하고 이구영이 감독한 영화를 제작하였다. 이경선,주삼손,전옥,김연실,·윤봉춘 등이 출연하였으며, 당시로서는 8,000원이라는 많은 제작비를 들인 작품이었다. 이 영화에는 라는 단역배우 김팔지가 출연했는데 그는 김연실을 사모한 친구였다. -金蓮實- -僧房悲曲의 金蓮實- 도대체 김연실이란 여자는 어떤 여자인가? 배우로서 가수를 겸했던 김연실은 1910년 경기도 수원군 고장면 매탄리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평안도 성천과 황해도 해주에서 군수를 지낸 김연식(金蓮植)이었고, 그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수원 화성의 삼일여학교를 졸업했다. 재학중이던 13세 무렵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두 해 뒤에는 모친마저 먼저 사망했다. 졸지에 고아가 된 김연실은 주위사람의 권유로 결혼을 하게 되지만 결국 그 혼인은 실패로 돌아가고 다니던 학교도 중퇴했다. 오빠는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극장 단성사에서 청년변사를 하며 힘겨운 삶을 이어갔다. 오빠의 추천으로 김연실은 17세에 무성영화 <아리랑>의 주제가인 <신조아리랑>을 영화필름이 돌아갈 때 단성사에서 육성으로 불렀다. 이때 오빠는 나운규에게 여동생을 소개했고, 그 인연으로 김연실은 영화 <잘 있거라>에 배우로 출연할 수 있었다. 이것이 김연실의 첫 출연작품이다. 1926년 고학으로 서울 근화여학교를 마쳤지만 오빠마저 세상을 떠나고 소녀가장이 되어 남동생을 돌보며 살아야 했다. 동생도 나운규프로덕션에서 촬영기술을 배워 기사가 되었다. 훨씬 뒤의 이야기이지만 김연실의 남동생 김학성은 배우 최은희(崔銀姬)와 결혼했던 첫 남편이었다(6.25 때 다쳐 이혼, 최은희는 신상옥과 결혼) 김연실은 1931년부터 1935년까지 5년 동안 영화 <명일의 여성>, <어머니>, <싸구료박사>, <승방에 지는 꼿>, <임자 없는 나룻배>, <아름다운 희생>, <홍길동전>, <전과자> 등과 연극 <수일과 순애>, <아리랑고개>, <대도전>, <심청전>, <춘향전> 등에 분주히 출연하였다. 1942년 창씨개명 시기에 김연실의 이름은 가네이(金井實千代)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었다. 8·15해방이 되자 다시 영화인으로서의 면모를 회복해서 <노도(怒濤)>, <사랑의 맹서>등 여러 연극무대에 출연했다. 김연실의 마지막 영화출연은 1949년 <돌아온 어머니>이다. 6·25가 일어나자 김연실은 당시의 남편 김혜일(金惠一)과 함께 월북한다. 김혜일은 화가이자 좌익언론인이었다. 북에서 김혜일은 <피바다>, <유격대 5형제> 등의 영화미술을 담당했고, 김연실은 영화 <정찰병>, <유격대 오형제>, <청년전위>, 등 4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북에서 김일성의 칭찬을 받으며 인민배우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김연실은 1997년 87세로 사망했다. -落花流水를 부른 金蓮實- 그렇다면 그런 그녀를 죽도록 사모한 김팔지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애초에 종로에서 큰 구두방을 했다. 그가 그냥 구두방이나 하고 살았으면 그의 인생이 안락된 인생을 살았겠지만 영화에 나오면서 결국 영화보다 더 비극의 인생이 되었다. 그는 김연실을 사모한 나머지 당시 유행하는 구두를 만들어 모두 김연실에게 선물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전혀 호감을 갖지 않았다. 오갈데 없는 그녀와 남동생을 위해 집한채를 사서 같이 살았지만 소용없었다. 마침내 윤봉춘에게 부탁 설득해 보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다 그는 소개한 여자와 결혼하고 아이까지 두었으나 그 아이가 죽고 그의 아내는 도망가고 말았다. 모든 것이 그의 뜻대로 되지 않자 다량의 양잿물을 먹고 자살을 시도하였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목구멍이 말라 숨을 겨우 쉴 다름이었다. 마침내 가슴에다 고무 호스를 꽃았는데 아픔을 참기 위해 아편을 가까이 하다가 중독자가 되어 구걸을 하고 다녔다. 그래도 그녀를 잊지 못해 촬영장을 쫓아 다니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 해를 넘기지 못하고 한 많은 생을 마쳤다. 김연실을 그토록 사랑했지만 손목 한번 잡아 보지 못한 채 한많은 세상을 하직한 것이었다.. 영화 <僧房悲曲>보다 더 비극이었다. 남편따라 월북한 김연실. 그리고 끝내 잊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은 김팔지. 그는 죽어서 소원을 이루었을까? 그 후 僧房悲曲은 다시 한번 영화로 나왔다. 1958년 윤봉춘 감독에 성소민, 김신재, 엄앵란이었다.
♣머무시는 동안 즐거우셨으면 합니다♣ ★一片丹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