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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日本 演歌)Music

♬吉良の仁吉/美ち奴♬

      
    ♬吉良の仁吉/美ち奴♬ 
    (作詞 萩原四朗/作曲 山下五朗)
    (데이찌꾸 레코드 발매 吉良の仁吉 원판)
    一,
    海道名物 数あれど
    三河音頭に 打ち太鼓
    ちょいと太田の 仁吉どん
    後ろ姿の 粋なこと
    二,
    吉良の港は おぼろ月
    泣けば乱れる 黒髪の
    赤いてがらも 痛ましや
    お菊十八 恋女房
    三,
    引くに引かれぬ 意地の道
    止めて呉れるな 名がすたる
    いやな渡世の 一本刀
    辛い別れを なぜ切らぬ
    四,
    嫁と呼ばれて 未だ三月
    ほんに儚い 夢のあと
    行かせともない 荒神山へ
    行けば血の雨 涙雨
    
    
    美ち奴
    
    
    侠客 吉良の仁吉
    
    吉良の仁吉(きらのにきち: 二吉로도 씁니다. 
    本名: 太田仁吉, 1839年~1866年)清水次郎長의 義兄弟로서 
    江戸幕末期에 活躍한 侠客입니다. 
    州吉良横須賀(現在의 愛知県 幡豆郡 吉良町)에 
    没落한 武士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寡默하지만 腕力과 相撲에 强하고, 相撲 後로는 싸움으로 侠客의 頭目의 寺津의 間之助 
    (寺津는 現在의 愛知県 西尾市 寺津町)에 隱匿한 것이 契機가 되어, 
    18歲부터 3年間을 次郎長과 兄弟로서 가까운의 사이가 된 後, 
    吉良에 돌아와 吉良一家를 일으켰습니다. 
    侠客인 穴太의 徳次郎 (通称、穴太徳(あのうとく), 
    穴太는 現在의 三重県 東員町 穴太의 일) 
    「安濃徳」이라고도)가, 次郎長 一家가 身世진 伊勢의 吉五郎
    (神戸의 長吉(かんべのながきち)」라고도. 
    神戸는 現在의 三重県 鈴鹿市 神戸)의 勢力圈인 伊勢 荒神山
    (いせこうじんやま)를 빼앗았기 때문에,
     徳次郎의 部下나 岡っ引 等의 往來도 끊고, 世上에 말하는
    「荒神山の喧嘩(血闘)」에 參加했습니다. 
    싸움으로 吉五郎 側은 勝利를 거두었지만, 仁吉은 鉄砲에 負傷 當한 後, 死亡합니다. 
    享年 28. 義理에 두껍고 義理에 폐인 길은 後世, 人情物의 講談이나 
    日本 固有의 창(義理나 人情을 노래한 大衆的인), 
    演劇이나 數많은 映畵, 歌謠曲 等의 素材로 다루어지는 存在가 되었습니다. 
    荒神山의 싸움에 吉五郎 側으로 参加한 한 사람으로 後에 旅講釈師가 된 
    松廼家太琉가, 講談師의 三代目 神田伯山에게 材料로서 当時의 貌襲을 伝해 
    더욱 伯山의 講談을 義理나 人情을 노래한 浪曲師의 二代目 広沢虎造가 採録하고 
    浪花節로 한 것으로 널리 알려지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문에 史実과 만들어낸 이야기가 混在해 伝해지고 있어 
    演劇이나 映畵에서는 仁吉은 徳次郎의 女同生•お菊를 아내로 맞이했지만, 
    吉五郎의 助太刀을 爲해서 お菊를 離縁했다고 여겨지지만, 
    仁吉에게는 結婚歴이 없기 때문에, 後에 創作된 것이라고 말해집니다. 
    무덤은 그 一周忌에 次郎長가 太田家의 遺族과 함께 建立한 것이, 
    지금도 誕生地의 吉良町에 있는 源徳寺(真言宗)에 남아 있습니다. 
    高神山 観音寺(真言宗,三重県 鈴鹿市)에 남아있는 吉良仁吉之碑는, 
    後世에 二代目 広沢虎造가 建立한 것입니다
    (元來 高神山(こうじんさん)이라고 하는 절에 붙이는 이름인 것이, 
    仁吉 等이 싸움 한 건이 伝해 가는 동안에 荒神山(こうじんやま)가 되어 버렸습니다). 
    現在, 吉良町에서는 吉良三人衆(그 밖에 尾崎士郎,吉良上野介義央) 의 한 사람으로서 
    每年 6月에 墓祭 를 兼한「仁吉まつり」을 하고 있습니다. 
    (作成者 黃圭源)
    
    
    吉良の仁吉(카라오케)
    비록 우리 민족에게는 뼈아픈 역사이겠으나 우리 가요와 
    일본 가요의 관계를 생각하면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언제나 논란이 되는 엔카가 먼저냐 우리 가요가 먼저냐 하는 
    머리 아픈 문제는 잠시 접어두고 시간이 나는대로 
    우리 옛 가요와 일본 옛 가요를 비교해서 
    들어보는 장을 마련해 보고자 합니다. 
    지금도 70대 이상의 어르신들이 곧잘 일본의 옛노래를 
    기억하시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고 
    우리 귀에 익은 노래들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처음 선 보이는 곡은 쇼와 14년 (1939년)에 발표되었다고 하는 
    일본 가수 美ち奴의 吉良の仁吉 입니다 
    美ち奴는 우리나라의 이화자 여사와 비견되는 일본의 민요 가수라고 하며 
    1919년(1917년?) 生이라고 하니 실제 연배도 
    이화자 여사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일제 강점기(우리에겐 일제 강점기지만 일본인에게는 戰時라고 불리우던 
    1930년대 중/후반) 일본 가요계에 등장하여
    게이샤 출신의 가수로서 (이 점 역시 이화자 여사가 기생 출신이라는 점과 흡사합니다) 
    많은 인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지금 올려드리는 吉良の仁吉의 가사는 찾지 못하였는데
    吉良の仁吉는 에도 막부 시대 말기에 활약하였던 협객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일본어에 능통하신 여러 선생님이 계시다면 도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확한 가사는 알지 못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리바이벌된 
    이난영 여사의 홍도 가사 내용과
    몇몇 들리는 단어로 유추해 보건데, 
    吉良の仁吉와 연인 사이였던 한 여성이 항구에서 
    그를 떠나 보낸 뒤 부르는 애절한 내용이 아닐런지? 
    (어디까지 추측일 뿐입니다..)(펌)
    


♣머무시는 동안 즐거우셨으면 합니다♣ ★一片丹心★